* 빈방 있습니까?
최 종 률
이 희곡은 미국에서 있었던 실화(實話)를 번안한 작품이다.
등장인물
※ 덕구를 제외한 모든 등장 인물의 이름은 가능한 한 배우들의 실명(實名)으로 한다.
1. 이선생 (주일학교 교사, 해설)
2. 덕구 (여관집 주인)- 이슬.
3. 강민 (목자2, 동방 박사2, 로마 병정2)
4. 가람 (요셉)
5. 한나 (마리아)
6. 수진 (목자1, 동방 박사1, 로마 병정1)
7. 현주 (목자3, 동방 박사3, 로마 병정3)
때 : 현대 (공연되는 시점/ 94년 겨울)
곳 : 어느 교회.
이선생: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날, 믿음으로 그 분을 맞이하며 기쁨과 감사를 나누는 날, 그 거룩한 설레임 이 있는 날. 사람들은 성탄절이 갈 수록 많이 변해 간다고 탄 식하고 있지만 그래도 성탄절이 마음 설레는 성스러운 축제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 으리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성탄절에 얽힌 아름다운 기억들을 가지 고 있지요. 오늘 여러분께 보여 드릴 이 짤막한 연극도 제가 소녀처럼 곱게 접어 둔 추억의 장 가운데 한 부분이죠. (사이 회상하듯) 박덕구... ( 무대 한 켠 의자에 앉아 있는 덕구에게 조명이 비췬다.) 덕구라는 아이와 성탄절. 제가 특별히 [덕구의 성탄절]이라고 부르고 싶은 사건이 오늘 연극의 전부입니다. 3년 전 겨울 제가 다 니던 교회 주일학교에서는 여는 해와 마찬가지로 성탄극 준비가 한창이었죠. 전 그 해에도 연출을 맡았던 터라 그 악동들과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가지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회상할 수록 가슴이 저며 오는 그 해 성탄 절 그 사건... [덕구의 성탄절]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선생에게 비취던 조명이 꺼지고 무대 밝아지면 아이들이 모여 앉아 떠들고 있다. 덕구는 약간 동떨어져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만 함께 잘 어울리지는 못하고 있다.)
강민 : (갑자기 일어서 큰 목소리로 대사를 읊는다.) "가이사 아우구스도 대 로마제국의 황 제의 칙령이다. 모든 백성들은 각기 자신의 출생지로 돌아가 호적을 시행할 것이며, 모든 총독들은..."
수진 : 강민아 뭐 하는 거니?
강민 : 아니, 내 말은 대사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느냐 이 말이야.
현주 : 그래 봤자 쫄병 역에다가 대사라곤 그거 한 마디 뿐인데 지가 폼 잡아봤자지 뭐.
강민 : 하긴 그래.
수진 : 그런데 마리아 역은 누가 하게 될 것 같니?
현주 : 그야 당연히 한나 아니겠니?
가람 : 아니야. 예상을 뒤엎고 현주가 마리아 역을 하게 될 수도 있지.
강민 : 뭐 현주가 마리아? 야! 이게 무슨 코미딘지 알아?
(아이들 와르르 웃는다.)
현주 : 햐, 이것들이 아주 날 가지고 노네. 다시 말해 봐. 뭐, 코미디?
수진 : 고정하소서 현주 여사. 혈압이 심히 염려되옵니다.
현주 : 야 수진이 너까지. 너 가만 안 둬.(잡으려 한다.)
수진 : (덕구 뒤로 숨으며) 살려주세요. 덕구씨.
현주 : 목소리하며 도망치는 폼이 영락없는 여관집 주인 역이다. (목소리를 바꿔) "글쎄 우 리 집엔 방이 없다니까요."
덕구 : (머뭇거리다가 일어서며) 저어, 있지 응. 나 벤소 갔다 올께 선생님 오시믄 나 벤소 갔다구 그래. (나가다 다시 돌아보며) 나 아주 가는 거 아냐.
한나 : 알았어 덕구야. (우습다는 듯이) 안심하고 잘 갔다 오기나 해.
가람 : 여관집 주인은 그렇다 치고 요셉은 누가 맡게 될 것 같니?
현주 : 지가 맡게 될 것 같으니까 괜히 저러는 것 봐. (아이들 웃음)
가람 : 야, 솔직히 말해서 요셉 하면 나 한요셉 아니냐.
현주 : 햐, 정말 인물 없다. 가람아, 네가 뭐 자칭 차인표니 뭐니 하면서 대단한 미남인 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미안시럽지만 차인표가 아니라 넌 차림표가 낫겠다. (아이 들 다시 웃음 터진다)
강민 : 근데 선생님은 왜 아직까지 안 오시는 걸까?
수진 : 글쎄 말야. 맨날 우리보구 시간 안 지킨다고 말씀하시면서.
한나 : (밖을 내다보다가) 선생님 오신다.
(모두들 급히 의자를 정돈하여 앉고 이선생 대본을 들고 헐레벌떡 들어온다)
이선생: (아이들을 둘러보며) 다들 모였구나. 그런데 덕구가 안 보인다. 박덕구 안 왔니?
강민 : 화장실 갔어요.
한나 : 선생님 정확히 십 분 지각이에요.
이선생: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하다. 차가 많이 막혀서...
아이들: 말로만요?
이선생: 야 이놈들... 그래, 오늘 그 벌로 이따 연습 끝나고 떡볶이 사주지. 자, 그럼 기도하 고 시작하자. 강민아 기도 부탁한다.
(모두 조용한 가운데 강민이가 더듬거리면서 기도한다. 기도가 끝나자 아이들 킥킥대며 웃는다.)
이선생: 이런 녀석들하고는. 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거지 주문 외우듯이 술술 할 필요는 없는 거야. 강민이 기도해 줘서 고맙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배역을 결정해야 하 겠지. 그런데, 먼저 너희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 잘 들어. 연극에서는 주역을 맡느 냐, 단역을 맡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이런걸 뛰어 넘어서 누가 어떤 역을 맡게 되든 자신이 맡은 역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창조해 낸다는 것 이게 중요하다. 더 구나 이번 작품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성탄의 메시지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데 우리의 마음과 뜻을 모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단순히 재미를 위한 연극이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사이) 내가 너무 논설쫀가?
아이들: (소리 높여) 예!
이선생: 이 녀석들. 좌우간 이번 공연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서로 협동하고 희생하고 사랑하 면서 영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도록 한 번 열심히 해보자. 알겠니?
아이들: (저마다 소리 친다) 예.
이선생: 자, 그럼 지금부터 배역을 발표하겠다. (대본을 편다)
수진 : 아휴! 숨 넘어간다.
한나 : 아이 떨려. (강민을 보며) 넌 안 떨리니?
강민 : (담담한 척) 떨어봤자지 뭐. 내 주제에 단역밖에 더하겠니?
이선생: 왜들 이렇게 웅성거리지?
현주 :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씀하세요. 선생님.
이선생: 그럼 발표한다.
현주 : (조그맣게) 더 있다 천천히 발표해도 괜찮은데...
이선생: 아 참. 너희도 알다시피 이번엔 지원자가 적어서 경우에 따라선 1인 3역까지도 해야 돼. 잠깐만.
(이선생 갑자기 생각난 듯 대본에 무언가를 적어 넣고 그 사이 아이들의 장난기가 다시 동한다.)
현주 : 와! 그럼 주인공 하나 맡는 것보다 단역 몇 개 맡는 게 더 낫겠다.
가람 : 그러니까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가 돼 본다 이거지?
현주 : 사나이? 너 지금 그거 나 보구 한 소리야?
가람 : 어, 내가 사나이 랬나? 근데 그 말이 널 보구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 었을까?
현주 : 너 정말 혼나 볼래?
수진 : 쉬! 조용히 좀 해.
이선생: 이강민.
강민 : 예!
이선생: 강민이는 목자2와 동방박사2 그리고 로마 병정2를 한다.
강민 : 세 개를 하라구요?
이선생: 그래 넌 아라비아 숫자 2로 통하는 거야.
강민 : 와! 아까 연습한 거 내꺼 맞다 그지?
현주 : 대사 한 마디 짜리 역도 아슬아슬했는데 축하한다.
이선생: 현주야.
현주 : 네.
수진 : (작은 소리로) 마리아 역이라도 맡게 되나 보지?
이선생: 현주는 목자3과 동방 박사3, 로마 병정3.
(아이들 한꺼번에 와르르 웃는다.)
현주 : 잘 못 부르신 거 아녜요?
이선생: (대본을 보며) 아니.
현주 : 선생님, 그건 남자역 이잖아요.
이선생: 미안하다만 남학생이 모자라는 걸 어쩌겠니?
현주 : 솔직히 자존심 상해요.
이선생: 그래도 선생님은 현주가 이해 해주고 잘하리라 믿는데...
현주 : (뾰로통하게) 예 한 번 해 볼께요.
이선생: 그래 고맙다. 그리고 수진아! 수진이는 목자1...
수진 : (그대로 받아) 동방 박사1, 로마 병정1을 할 것.
이선생: 옳지, 똑똑하다.
수진 : 선생님 그럼 저도 배역이 세 개네요.
이선생: 그렇지. 자 , 다음은 마리아역. 마리아역엔,
(아이들 서로 얼굴을 본다.)
수진 : (낮은 목소리로) 아마 한나일거야.
강민 : 사실 한나밖에 더 있냐?
이선생: 그래, 너희들 말대로 마리아 역엔 한나다.
아이들 : 축하한다. (박수를 친다)
가람 : 난 왜 아직 안 나오지? 남은 건 요셉과 여관집 주인인데...
수진 : 니가 바로 여관집 주인 감이다.
가람 : 내가 여관집 주인이면 요셉은 누가 하니?
강민 : 1인 3역도 하잖아.
가람 : 1인 3역 할게 따로 있지 어떻게 이걸 동시에 할 수 있니? 같이 나오는데. 요기서 "빈 방 있습니까?" 또 요쪽에 가서 "빈 방 없어요." 그러냐?
강민 : 그것도 그런데!
이선생: 다음, 여관집 주인은...
아이들: 한가람! 한가람! 한가람!
이선생: 박덕구로 한다.
수진 : 뭐 박덕구라고?
강민 : 말도 안돼.
현주 : 여자가 남자 역도 하는데 그럴 수도 있지 뭐.
가람 : 선생님, 잘 못 들었는데요.
강민 : 다시 한 번 불러 주세요.
이선생: 여관 주인역엔 박덕구라니까.
(너무 뜻밖이라는 듯 아이들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이선생: 왜들 그래? 뭐 잘못 됐어.
수진 : 잘못 됐다가 보다는 요... 그냥 그러네요.
이선생: 이놈아. 그냥 그렇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한나 : (당돌하게) 선생님, 물론 선생님께서는 심사숙고하셔서 결정 하셨겠지만요. 여관 주 인역엔 박덕구가 적합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선생: 왜 그렇게 생각하지?
수진 : 네 그건...
한나 : (낮게) 수진아 말해.
수진 : 걔를 무시해서가 아니라요, 그 역은 좀 날카로운 인상이어야 되지 않을까 해서... 저 희 생각엔요...
이선생: 그럼 너희는 덕구가 이 역을 잘 해내지 못할 거란 말이지?
현주 : (아이들을 둘러보며) 걔라고 여관 주인 하지 말란 법이 어딨어?
한나 : 쟤 왜 저러니?
이선생: (아이들을 향해 조용히 웃으며) 글쎄, 너희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다만 내 생각엔 덕 구라도 그 역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강민 :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실 저희도 누구 못지 않게 덕구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공연이라는 큰 목표를 위해서는 좀 더 현실적 인 고려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선생: 넌 선생님보다 말을 더 어렵게 하는구나. 그러니까 '현실적인 고려'란 뭐야?
강민 : 만약, 만약의 경우에 덕구가 대사를 외우다가...
한나 : 공연 중 대사를 까먹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리구...
이선생: 김한나, 넌 대사 한 마디 안 틀리고 무대에 설 자신 있니?
가람 : 그렇지만 덕구는 말도 어눌하고...
이선생: (화가 나서) 무슨 소리들이야, 이놈들! (밖을 향해) 박덕구! 박덕구 아직 멀었냐?
덕구 : (밖에서) 지금 가요.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들어서며) 선생님 오셨어요?
이선생: 이리 와 봐라. 너 여관집 주인역 할 수 있겠지?
덕구 : 여관집 주인요? 누가요?
이선생: 네가 여관집 주인이야. 너 할 수 있겠니?
덕구 : 선생님, 나두 시켜 주는 거에요?
이선생 : 물론이지. 너도 연극에 참가하겠다고 했잖니. 할 수 있겠지?
덕구 : 네...? (기뻐하며) 네, 선생님!
이선생 : 봐라. 덕구는 자기 의사를 분명히 표시했다. 이제 이의 없겠지?
한나 : 하지만 선생님, 공연 중에 대사를 잊으면.
이선생 : 김한나! (다시 아이들을 바라보며) 너희가 서로 도와 가며 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으리라고 선생님은 믿는다. 자, 다음은 요셉역이 남았지.
수진 : 그건 정말 뻔하잖아요.
가람 : (과장된 어조로) 아! 난 떨이로구나.
수진 : 그래도 주인공이다 얘!
가람 : (어깨에 힘주며) 한가람입니다. 일명 차인표라고 하지요. 많은 사랑 바랍니다.
(아이들 저마다 야유를 보낸다.)
이선생: 자, 자, 곧바로 연습에 들어간다. 준비해.
현주 : 선생님, 시간 좀 주세요. 야! 1인 3역짜리들 모여. (셋이 모인다) 사실 연극에서 엑스 트라 빠지면 무슨 재미냐?
강민 : 와! 그러니까 우리가 빠지면 3×3=9. 아홉 명이나 빠지는 거네.
현주 : 그렇지. 그런 의미에서 화이팅을 한 번 하는 거야. 손뼉 세 번 치고 '엑스트라, 엑스트라 화이팅, 헤이 야!' 알았지?
현주,강민,수진: (박수를 세 번 치며) 엑스트라, 엑스트라 화이팅, 헤이 야!
(아이들 시끄럽게 반응하며 조명이 꺼진다. 잠시 후 이선생, 해설자의 위치로 나서며)
이선생: 여관 주인역! 대사 스물 세 마디의 조연급. 덕구의 몇 십 년 생애 중에 가장 감격스 러운 날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신바람이 난 덕구는 열심히 대사를 외우기 시작했고 일주일이 지나자 대본은 아예 걸레가 되어 버렸죠.
(무대 한 켠에 조명이 들면 대본과 씨름하는 덕구의 모습)
덕구 : (말이 잘 안되는지 입 운동을 해 가며) 글쎄 기찮게 왜애 자꾸 이러시오? 같은 말을 멫번이나 반 반복해야하 합니까? 우 우리 집엔 빈 반이 없습니다. (고민하며 ) 여기 가 되게 안된단 말야. "같은 말을 멫번이나 반 반복" 아, 요기 "반 반복해야 합니 까? 우 우리 집엔 빈 반이 없습니다." (대본을 한 장 넘기고 ) "하지만 저쪽길 오른 쪽으로 돌아가면 낡은 마구간이 하나 있을 거외다. 거기다..."(덕구에게 비치던 조명 이 꺼지면서 무대 전체가 밝아진다. 아이들 모두 연습이 한창이다.)
강민 : "보시오." (위를 가리키며) "별이 멈춰 섰어요."
이선생: 잠깐, 강민이 너 손 좀 봐라. (다가가서) 손이 이게 뭐니? 손가락이 좀더 멀리를 가 리켜야 하잖아. 그리구 좀더 감격스럽게 해봐 (사이) 지금 그 때로 돌아갔다고 생각 해 보라구. 얼마나 감격스럽겠니. 상상력을 동원하라는 얘기야. 알겠지? 자, 다시 시 작하자. 감격스럽게!
강민 : "보시오. 별이 멈춰 섰어요."
이선생 : 봐. 달라지잖아.
가람 : 뭐 별루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이선생: 아니, 좋아. 이제 목동의 장면으로 넘어가자. 빨리 해라. 자는 장면. 자, 준비됐니?
현주 : 난 이 장면이 제일 좋더라.
가람 : 먹는 장면이 있으면 더 좋아 할거다.
이선생: 조용!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덕구의 대사 외 우는 소리에 자주 중단된다.) "그것은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 오늘밤 너희의 주님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수진 : 선생님, 그런데 천사 역은 누가 해요? 천사 역은 안 정했잖아요.
이선생: 글쎄, 선생님 생각엔 녹음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강민 : 저어 선생님, 그거 제 목소리를 녹음하면 안될까요?
한나 : 주제를 좀 알아라., 네가 그걸 할 수 있으면 덕구도 할 수... (현주 옆구리를 꼬집자 놀라며) 선생님, 죄송해요.
(모두 조용해진다)
이선생: (잠시 있다가) 대본으로 돌아가자. "오늘 밤 너희의 구주께서 다윗의 고을에 나셨다. 그분은 성경에서 언약하신 우리 주 그리스도이시다."
수진 : "들어봐. 무슨 소리가 들리지?"
강민 : "들리긴 뭐가 들린다고 그래." (눈을 비빈다)
이선생: 자다 일어난 사람이 그렇게 팔팔하냐? 대사에 하품을 섞어서, (직접 해 보인다. 하 품을 섞어서) "들리긴 뭐
가 들린다고 그래."
강민 : (하품을 섞어서) "들리긴 뭐가 들린다고 그래."
현주 : (하품을 섞어서) "아냐. 나도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이선생: 현주 넌 하품을 섞는 게 아니지.
현주 : "아냐. 나도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이선생: "너희는 아이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되리니 그것이 바로 그분 을 나타내는 표니라."
현주 : (안 들리게) 선생님도 별로다 그치?
(모두 키득거린다)
이선생: 쉿! 조용히.
강민 : "잘못 들은 거 아냐?"
수진 : (대본을 슬쩍 들여다보며) "한 사람이면 몰라도 둘다 잘못 들을 리야 있겠어?"
강민 : (머리를 끄덕이며) "그건 그래."
이선생: 잠깐, 목자2 그 대사 자르자.
강민 : 또 잘라요? 제 대사 전부 해야 아홉 개 뿐인데, 그것도 남들 긴 대사 다 듣고 나서 " 그렇지" 아니면 "맞아" 주로 이런 거잖아요.
아이들: 잘라요, 잘라.
이선생: 자, 자, 얘들아 좀 조용히 하자. 강민아! 꼭 대사가 많아야 좋은 건 아니잖니. 작품 전체를 생각해야지.
강민 : 알았어요. 그렇지만 더 자르진 마세요.
이선생: 두고 봐야지. 자, 목동2 "잘못 들은 거 아냐?" 부터 다시.
강민 : (볼멘 소리로) "잘못 들은 거 아냐?"
수진 : "한 사람이면 몰라도 둘 다 잘못 들을 리 있겠어?"
(강민, 머리만 끄덕인다.)
현주 : "다윗의 고을이... 그럼 베들레헴이잖아. 맞았어. 성서에 그런 얘기가 있었어. 예언자 의 선지자의 예언..."
이선생: 뭐 하는 거야? 예언자의 선지자... 나까지 헷갈리네. "선지자의 예언이 있었다구." 안 되겠다. 너 그 대사 다섯 번 큰소리로 반복해. (현주 복창한다.)
현주 : "선지자의 예언이 있었다구 다윗의 고을에서 한 처녀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수진 : (귀엽게) "아니, 우리가 그렇게도 기다린 메시아가 이곳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단 말이 지?"
이선생: 자알 한다. 자알 해.
현주 : 괜찮았어요?
이선생: 정말 잘 한 줄 알아? 너희들이 아무리 여학생이지만 이건 남자 역이잖니 남자처럼 좀 해봐.
수진 : (의식적으로 남자 목소리를 흉내 내며) "아니, 우리가 그렇게도 기다린 메시아가 이 곳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단 말이지?"
이선생: 좀 나아졌다. 계속 해봐.
현주 : (역시 남자 목소리를 흉내 내며)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 신 거야. 난 그렇게 믿어."
수진 : "나도 그렇게 믿어."
강민 : (수진과 정면으로 마주 서서)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선생: 잠깐, 수진이하고 강민이는 그렇게 정통으로 마주보면 안돼. 둘이 결투하는 거 아니 잖아. 가능한 대로 객석에 몸을 많이 노출시켜야지. 현주 대사부터 다시 해봐.
현주 :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신 거야. 난 그렇게 믿어."
수진 : "나도 그렇게 믿어."
강민 :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현주 :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서둘러야지."
수진 : "그래, 그곳을 찾아가는 거야."
현주 : (대본을 보며) "베들레헴까지는 멀지 않으니까 단숨에 뛰어가기로 하세."
이선생: 서두르면서.
강민 : "어서 가 경배하세."
이선생: 됐어! 많이 좋아졌어.(셋 손바닥을 부딪치며 환호한다) 좀 더 느낌을 가지고 해준다 면 여기선 더 바랄게 없겠다. 그럼 시간 관계로 다음은 쭉 앞으로 가서 5장 여관집 장면을 하기로 하자. 자, 여관집 장면이다. 아, 잠깐만. 이 장면에서 나귀가 직접 나 오면 어떨까?
수진 : 나귀를 어떻게 등장시켜요?
이선생: 간단하지. 두 사람이 만들면 되거든. 생각 난 김에 아주 정해 버리자. (살펴보다가) 강민아, 너 이 장면에 안 나오니까 네가 해라. 나귀의 앞부분은 네가 하고 뒷부분은 소도구를 맡은 영철이가 하기로 하지.
강민 : 세상에 반쪽 짜리 역도 있어요? 그럼 전 역이 세 개 반이네요. (사이) 가만있어. 그 럼 프로그램에다가 나귀 앞다리역 이강민, 나귀 뒷다리역 김영철 이렇게 낼 거에요?
이선생: (웃으며)그것도 재미있겠는데.
한나 : 선생님, 나귀를 무대에 등장시키려면 굉장히 번거로울 것 같아요. 그걸 의상이라고 해야 되나? 나귀 가죽을 뒤집어 써야 되잖아요. 그럼 예산도 훨씬 많이 들테고, 꼭 국민학교 학예회 같은 게...
이선생: (생각해 보고) 한나 말이 옳은데. 그럼 빼도록 하자. 나귀는 무대 뒤에 있다고 가정 하는 거야. 연극은 워낙 무대와 관객 사이의 약속이니까.
강민 : 하기 어려우면 꼭 '관객과의 약속이다.' 그러시더라.
이선생: 녀석이 중얼대긴. 자, 무대밖에 나귀가 멎었다.
강민 : "히이이잉. 히이이잉"
이선생: 요셉이 마리아를 나귀에서 내렸다.
현주 : "쿵!"
이선생: 들어왔다. 자, 대사!
가람 : "사람들로 여관마다 꽉 찼으니... 가는 데마다 거절당할 수밖에 없구려."
이선생: 아, 잠깐, 잠깐. 그건 가람 네 말이지 어디 요셉의 말이니. 좀 요셉같이 해라. 상상력 동원!
아이들: 그래 상황 몰입!
가람 : "호적 하러 온 사람들로 여관마다 꽉 찾으니...
이선생: (시범을 보이며) "가는 데마다 거절당할 수밖에 없구려."
가람 : "가는 데마다 거절당할 수밖에 없구려."
이선생: (사이) 뭘 눈치를 슬슬 보니, 또 해줄 줄 알고? 맨날 앵무새처럼 따라 할 생각 말고 스스로 해봐.
가람 : "마지막으로 이 여관에 들어가 부탁해 보는 수밖에 없겠군,"
이선생: (억양을 흉내내며) "마지막으로 이 여관에 들어가 부탁해..." 따다다다 따다다 따다 다다. 억양이 이상하잖아. 다시 해봐.
강민 : (입에 손을 대고) 쟨 안돼.
가람 : "이 집에서 거절당하면 이젠 더 찾아볼 곳이 없소."
이선생: 거절이 아니고 거어절.
가람 : "이 집에서 거어절당하면 이젠 더 찾아볼 곳이 없소." (사이) 마리아 뭐해? 야, 너 뭐 하니?
한나 : 요셉 대사 하나 더 있잖아.
가람 : 그 대사 어제 잘랐잖아.
한나 : 자르긴 언제... (무안해 하며) 잘랐구나.
가람 : 어휴, 저 돌.
한나 : 뭐라구? 너 말이면 단 줄 아니?
가람 : 되게 과민 반응이네. 농담도 못하냐?
한나 : 뭐, 농담? 선생님, 쟤하구 더이상 연극 같이 못하겠어요.
이선생: 이놈들 또 싸우기냐? 버릇없이.
한나 : (사이) 싸운 건 아녜요. 약간의 견해 차이지.
이선생: 녀석, 둘러대기는. 자, 그럼 계속하자.
한나 : 선생님, 근데 이렇게 서 있는 거 아무래도 이상한 거 같아요. 마리아는 만삭이잖아요.
이선생: 그렇지, 만삭인 아내를 어떻게 그냥 세워 둘 수가 있겠니.
(한나 브이(V)자를 보이며 웃는다.)
이선생 : 공연 땐 통나무를 하나 설정하기로 하고 이 의자 위에 앉혀 봐.
(이선생 대본에 기입하고, 요셉이 마리아를 의자에 앉힌다.)
이선생: 에이, 금방 네 입으로 만삭이래 놓고 그렇게 쉽게 앉으면 어떡하니. 내가 하는 거 봐. (시범을 보이자 여학생들 무안해 한다.) 어려운데. 경험이 없어서 원... 내일부터 배에다 뭘 넣고 연습하자 자, 다시 앉는다.
한나 : (힘들게 앉으며) "그래도 어딘가 우리를 위한 집이 있을 거예요."
현주 : 감정 좋고.
이선생 : 조용히 좀 해라. 너희들이 군소리를 하니까 연습이 자꾸 도막 나잖아 상황 몰입!
아이들 : 상황 몰입!
이선생 : 말들은 잘한다. (시계를 보고) 계속해.
가람 :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겠지. 여기가 바로 그 집이라면 얼마나 좋겠소. (사이) 주인 계십니까? 주인 계십니까?"
이선생 : 두 번째 부를 때는 좀더 크게 해야지. "주인 계십니까? 주인 계십니까!"
이선생 : (졸고 있는 덕구에게) 박덕구! (덕구 놀라서 깬다)
현주 : 너 나올 차례야. (덕구 잠이 덜 깨어 무대 반대편으로 간다)
이선생 : 넌 저쪽이야. (모두 낄낄거린다) 요셉, 다시 불러 줘.
가람 : "주인 계십니까?" (덕구 반응이 없다.)
이선생 : 덕구 뭐하니?
덕구 : 한 번 뿐이 안 불렀잖아요.
이선생 : 대본대로 두 번 불러 줘라.
가람 : "주인 계십니까? 주인 계십니까!"
덕구 : (이선생 눈치를 살피며) 나가요?
이선생 : 나오라니까. (덕구 무대에 나와 진수가 인사하자 맞절을 한다) 아냐. 네가 인사를 하면 어떻게 하니? 넌 주인이니까 당당하게 서 있어야지. (덕구 자세를 고친다. 사이) 뭐해, 대사 해야지.
덕구 : "아, 빈 바이 없습니다."
이선생 : "누구시오"가 빠졌어.
덕구 : 아! "누구시오?"
가람 : "빈 방 있습니까?"
덕구 : "아, 빈 바이 없습니다."
가람 : "죄송스럽습니다만 아내가 만삭이 돼서..."
덕구 : "글쎄, 사정은 딱하오 만..." 근데, 선생님.
이선생 : 또 뭐야?
덕구 : 만삭이 뭐예요? (아이들 웃는다)
이선생 : 아냐, 질문 잘 했어. 모르는 건 물어야지. 만삭이란.
현주 : 애기를 해산할 달이 꽉 찼다 이거야.
덕구 : 애기 해삼?
수진 : 해삼이 아니라 (힘주어) 해산! 애기 낳는 거 말야.
덕구 : 응, 해산.
이선생 : 인석들, 저희들끼리 다 하는구나. (덕구에게) 이제 알았지?
덕구 : 녜. (큰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선생님, 그러니까 인제 마리아가 예 예수님을 낳는 거죠?
이선생 : 그렇지, 자, 그럼 대본으로 돌아간다.
가람 : "죄송스럽습니다만 아내가 만삭이 돼서..."
덕구 : (마리아를 봐 주다가 표정에 연민의 빛이 어린다. 잠시 머뭇대다가) "글쎄, 사정은 딱 하오 만 지금 우리 집엔 손님이 깍 찼어요. 우리 유대인만 있는 줄 아슈? 노마 병정 도 있구."
이선생 : 노마 병정이 아니고 로마 병정.
덕구 : (발음이 잘 안된다) "로 로마 병정도 있구 또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하여튼..."
이선생 : 봐라! 덕구 대사 다 왼거! 아직 대본도 못 뗀 놈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
덕구 : (화가 나서) 선생님!
이선생 : 왜 그래?
덕구 : 나 핼거 더 있는데, 애 그래요?
이선생 : 그래, 그래. 미안하다. (사이, 덕구 머뭇거린다) 선생님이 미안하다고 그랬잖아. (덕 구 계속 머뭇거린다) 또 왜 그래?
덕구 : 근데 까먹었어요.
이선생 : 녀석두. (대본을 보며) "하여튼 당신네들 한테 줄."
덕구 : (낚아채듯) "하여튼 당신네들 한테 줄 바이 없습니다."
가람 : "아내가 곧 해산을 할 것 같아서 그럽니다. 어떻게 좀 편의를 봐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덕구 : "글쎄, 기찮게 애 자꾸 이러슈?"
이선생 : 덕구야, "기찮게 애"가 아니고 "귀찮게 왜"야. 이렇게 따라 해봐. "구이찮게 오애 자꾸."
덕구 : "구이찮게 오애 자꾸."
이선생 : 그렇지. 그걸 빨리 하면 "귀찮게 왜"가 되는 거야. 다시 해봐.
덕구 : "구이찮게 오애..."
이선생 : 안되겠다. 원래대로 하자.
덕구 : (고집스럽게 이선생이 가르친 대로) "구이찮게 오애 자꾸 이러슈? 같은 말을 멫번이 나 반 반복 (더듬는다. 모두 웃는다) 해야 댑니까? 씨!
(아이들 킥킥거리며 웃던 웃음이 왈칵 터져 버린다)
가람 : 선생님, 우스워서 못하겠어요.
이선생: 아, 조용히! 조용 하라니까.
덕구 : "우리 집엔 빈 바 바이 없습니다" (아이들 다시 웃는다)
이선생 : 조용! 덕구야 너 거기가 잘 안 되는구나. <방> 과 <반복>. 자, 선생님 따라 해봐.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합니까?"
덕구 : (긴장하여)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 반..."
이선생 : 자, 긴장 풀고. 반 복.
덕구 : 반 반복.
이선생 : "빈 방이 없습니다."
덕구 : (따라서 한다} "빈 바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웃는다.)
이선생: 바이 아니고 방이.
덕구 : "반 바이."
이선생: 방이라니까. 방하고 ' ' 받침을 분명히 해봐.
덕구 : 바이...
이선생 : 방이라니까. 방! 이렇게 쉬운 말도 못하면 어떻게 하니? 다시 해봐.
덕구 : "우리 집엔 빈 바이..."
이선생: (자제하며) 덕구야, 방이야. 넌 할 수 있어. 다시 해봐라. 방이!
덕구 : 바이
이선생 : 어허 방이!
덕구 : (점점 기가 죽는다) 바 바이.
이선생 : (큰소리로) 방이!.
덕구 : 바이...
이선생 : (화가 나서) 좋아, 됐어! 오늘 연습은 여기서 끝낸다.
수진 : 연습 끝!
강민 : 야, 오늘 되게 일찍 끝났다.
수진 : 라면 먹으러 갈 사람.
(현주, 수진의 옆구리를 꼬집는다. 아이들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강민과 현주 덕구에게 다가가 위로하자, 덕구 히죽 웃어 보인다.)
아이들: "선생님, 먼저 갈께요." "안녕히 계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이선생: (나가려는 아이들에게) 마침 기도는 안 하고 가니? (짧게 기도를 마치고) 의자 정리 하고 가거라.
(아이들 조용히 의자를 정리하고 모두 퇴장한다. 이선생 풀이 죽어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는 덕구를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다가가서 어깨를 다독여 주고 돌아선다)
덕구 : 선생님 가시는 거에요? (이선생 고개만 끄덕이고 퇴장한다.) 안 안녕 계세...가세요, 선생님. (사이) 아무도 없구나. "같은 말을 멫번이나 반복해야 합니까? 우리 집엔 바 이 없다구요. 바이..." (덕구 힘없이 주저앉는다. 침묵. 덕구의 몸은 종이가 구겨지듯 천천히 오그라든다. 무대 어두워지며 이선생에게 조명.)
이선생: 덕구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는 자책감에 전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그런 후회나 번 민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도 잠시. 보다 현실적인 문제가 고개를 들더군요. (서성거리며)
이런 식으로 해서 공연이 가능할까? 이건 동정심이나 연민의 정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어설픈 휴머니즘에 지나지 않는 거야. 지금이라도 배역을 다른 아이로 바꾸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러면 공연은 무리 없이 치뤄질거야. (한 자리에 서서 관 객을 바라보며) 하지만 덕구는 어쩌지 그렇게나 좋아했는데... 아냐,공연 성과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지? 어쩌면 덕구에겐 이번 공연이 자신감을 줄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몰라. 그래, 되든 안되든 한 번 해보자. (힘찬 표정으로) 누구에게든 가능성은 있는 거야 덕구에게 자신감을 주는 것. 그래 한 번 해보자구. 아멘.
(조명 꺼지고 무대 점점 밝아 오면 덕구 혼자 연습하고 있다.)
이선생: (무대 배경을 들고 들어와서) 박덕구! 일찍 왔구나.
덕구 : (깜짝 놀라 일어서서) 어, 선생님 오셨어요?
이선생 : 그래. 근데 덕구 시간 있으면 선생님 좀 도와주겠니?
덕구 : (기쁘게) 예! (배경을 보며) 와! 선생님. 되게 멋있어요.
이선생: 멋있니? 멋있다니까 좀 안심이 된다.
덕구 : 선생님, 그러니까 이게 에루살렘이에요?
이선생: 음, 베들레헴. 여관집 장면에도 필요한 배경이지.
덕구 : 아! 벨 렘!
이선생: 자, 이것 좀 이렇게 놓고. (사이) 덕구야, 연습 힘들지?
덕구 : 네. (사이) 하지만 참 재미있어요.
이선생: 그래,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면 넌 멋지게 해낼 수가 있을 거야. 그땐 아무도 널 무 시 못하게 본때를 보여주자고. 하지만 너무 부담은 갖지 말아라. 마음 편하게 먹고 연습에 임하는 게 좋아. 선생님도 도와줄 거니까. 알았지?
덕구 : (조그만 소리로) 네 선생님.
이선생 : 참, 덕구 너, 요 앞 문방구에 가서 테이프 좀 사 올래?
덕구 :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카세트 테이프요?
이선생 : 아니, 붙이는 테이프 말이야. (사이) 너, 근데 발음 좋다.
덕구 : (히죽 웃으며) 다녀올께요. 선생님.
(뛰어나가는 덕구를 이선생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깜짝 놀란 듯 관객들을 바라보고 자세를 바로 한다.)
이선생 : 시간은 어느새 날아가듯 지나갔습니다. 그 동안 생긴 에피소드도 많았지요. 공연이 임박해지자 연습에 몰두하다가 꿈속에서도 요셉과 마리아를 만나는 아이. 대사를 잠꼬대로 읊는 아이. 마리아는 뱃속에서 베개를 빠뜨리지 않나. (웃으며) 12월 24 일! 드디어 공연 날이 왔습니다. (조명 꺼진다)
(나팔 소리 들리고 조명이 한 곳에 들면 어둠 속에서 강민의 목소리 우렁차게 들린다.)
강민 : "가이사 아우구스도 대 로마의 위대하신 황제 폐하의 칙령이다. 천하의 모든 백성은 각기 자신의 출생지로 돌아가 호적을 시행할 것이며, 모든 총독들과 분봉 왕들은 백 성들이 호적을 시행함에 있어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만전에 만전을 기하라. 이것은 가이사 아우구스도 황제 폐하께서 내리시는 큰 은전이며, 위대한 제국 로마와 그에 속한 모든 나라들이 발전하는데 있어 커다란 초석이 될 것이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 만세!"
(다시 암전)
이선생: (어둠 속에서) 빨리 준비해라. 새로 넣은 대사 잊으면 안된다. 통나무 준비됐니? 덕 구 제자리로 갔어?
덕구 : 아휴! 깜깜해. 선생님, 어디루 가요?
이선생: 거긴 객석이야 이쪽으로 와. 자, 준비됐지? 조명 스탠바이 큐! (사이) 조명 뭐하나? 빨리 켜! 불 키라니까. 객석 조명 켜진다 아니, 객석 불을 켜면 어떡해! 객석 끄고 빨리 무대 불 켜!
(무대 밝아지면 나귀 소리 들리며 마리아와 요셉역의 아이들이 등장한다. 무대 양 옆에는 이선생과 아이들이 마음 졸이며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이어지는 대사와 동작이 연습 때보다 훨씬 다듬어져 있다.)
가람 : "여관마다 호적 하러 온 사람들로 꽉 찼으니 가는 데마다 거절당할 수밖에 없구려. 마지막으로 이 여관에 들어가 부탁해 보는 수밖에 없겠군. 이 집에서마저 거절당하 면 이제 더 찾아볼 곳이 없소."
한나 : "그래도 어딘가 우리와 아기를 위한 집이 있을 거에요."
가람 :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이요. 여기가 바로 그 집이라면 얼마나 좋겠소. (사이) 주 인 계십니까? 주인 계십니까!"
(여관 주인으로 분장한 덕구가 앞치마를 두른 채 나온다. 일순 옆 무대에 긴장이 감돈다. 덕구 사뭇 진지하다.)
덕구 : "누구시오?"
가람 : "빈 방 있습니까?
덕구 : "아, 빈 <방이> 없습니다."
가람 : "죄송스럽습니다만 아내가 만삭이 돼서..."
(극에 몰입해 있던 덕구 요셉과 마리아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
덕구 : "글쎄 사정은 딱하오 만 지금 우리 집엔 손님들이 꽉 찼어요. 우리 유대사람만 있는 줄 아시오? 로마 병정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단 말이오. (사이) 하여튼 당신네들 한테 줄 방이 없... (고민한다) 바이..."
가람 : (낌새를 눈치채고 이선생의 눈치를 보며 더욱 극적으로) "아내가 곧 해산을 할 것 같 아서 그럽니다. 어떻게 좀 편의를 봐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덕구 : "글쎄 귀찮게 왜 자꾸 이러시오?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야 됩니까. 우리 집엔 빈 방이... 빈 방이..."
가람 : (위기를 벗어나려고) "그러니까 빈 방이 없단 말씀이죠? 알겠습니다. 여보, 갑시다. (힘없이 돌아선다)
덕구 :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그치만... 여보세요.
(가람이와 한나 가다가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서 버린다. 이선생 긴장한다)
덕구 : "우리 집엔 바이..."
이선생 : 덕구야! (아니라는 듯이 손짓을 한다.)
덕구 : (이선생을 보며) 바이 없는거죠, 선생님?
이선생 : 너 잘하다가 왜 그래? 들어와. (손짓한다)
덕구 : "방이 없습니다. 우리 집엔 빈 방이 없다구요."
가람 : "알겠습니다. 여보, 갑시다." (다시 돌아선다)
덕구 : (거의 울듯이) 여보세요...
가람 : (난감해 하며) 아이고! 아, 네!
이선생 : 박덕구 들어와! 들어오란 말야!
한나 : 쟤 왜 저러니?
덕구 : "우리 집엔 방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눈으로) 있긴 있는데..."
이선생: (거의 애원하듯이) 너 왜 그래? 그게 아냐. 빨리 들어와.
덕구 : (이선생 쪽을 돌아보다가) "바이 없대요." (연극으로 겨우 돌아와) "방이 없습니다."
가람 : "아. 네. 여보 갑시다."
(이선생 가람이와 한나에게 빨리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가람이와 한나 서둘러 퇴장하려 한다.)
덕구 : (마침내 자제심을 잃고) 요셉! 마리아! 가지 마세요. (몇 걸음 쫓아가서) 우 우리 집엔 바이 있어요. 그짓말 아녜요. 진짜 빈 바이 있다구요.
(아이들 자제심을 잃고 우왕좌왕한다.)
수진 : 거 보세요. 덕구 시키지 말자고 그랬잖아요.(수건을 집어던진다)
강민 : 이렇게 될 줄 알았어!
한나 : (울상이 되어) 다 망쳤잖아!
가람 : 이게 뭐야!
이선생: (무대로 뛰어나오며) 여러분, 죄송합니다. (위를 향해) 조명 꺼! 조명을 끄라구! (관객을 향하여)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 위를 향해) 불 끄라니까!
(무대 조명 꺼지고 어둠 속에서 소음과 고함소리, 탄식과 울음소리가 어지럽다. 이윽고 해설자 자리의 이선생에게 조명이 비친다.)
이선생: 수라장이 되기는 객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관객이래야 친구들, 식구들, 교회 어르신 들 등 모두 친숙한 사람들이었지만 그 순간 관객들에게 그것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 뒤에 숨겨진 의미, 덕구의 성탄절이 준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조명 꺼지고 무대 중앙에 조명이 들면 엉망이 된 무대 위에 덕구 혼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눈물 때문에 범벅이 된 분장.)
덕구 : (조용한 허밍이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내가 연극 망쳐 놨어 요. 그치만 어떻게 고짓말을 해요... 우 우리 집엔 빈 바이 있걸랑요. 아주 좋은 방은 아니지만 요. 그건 하나님도 아시잖아요. 근데 어떻게 예수님을 마구간에서 나라구 그래요. 난 정말 에수님이 우리 집에서 태어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환 희에 가득 차서) 정말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에수님이 내 방에서 태어나신다니! 얼마나 신나요! 그럼요, 난 내 방도 쓸구요, 걸레 빨아갖구 방두 닦구요, 내 방 비워 놨을 거예요. 난 에수님이 좋아요. 에수님... 사랑해요. 에수님이 최고에요. 에수님은 내 죄 땜에 죽으셨잖아요. (운다. 긴 사이) 내가 연극 만쳐놔서 선생님하구 애들하구 속상해 할거에요. 속상해 하지 말았으문 좋겠는데... 내년에 또 하문 안 틀리고 잘할 수 있는데... 그치만 이젠 다시 안 시켜 줄 거에요 (사이, 힐긋 웃으며) 그래도 그게 어디에요. 한 번 해본 게! "아, 빈 바이 없습니다."
이선생: (무대 앞에서) 덕구는 그렇게 무릎을 꿇은 채 그 날밤을 그렇게 무대 위에서 지새 웠습니다. 가끔은 울며 가끔은 웃으며 덕구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새벽 녘 지친 덕구가 잠에 골아 떨어지자 하나님께서는 덕구를 위해 새하얀 눈을 내리셨 습니다. 눈송이들도 덕구의 영혼을 어루만지듯 그렇게 부드럽게 내렸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는 덕구의 빈 방에 안락한 잠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조명 꺼지고 조용한 성탄 음악이 합창으로 들린다. 무대에 다시 조명이 들면 이선생 피곤하고 허탈한 표정과 흐트러진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
이선생: (중얼거리듯) 무대를 치워야지... (어질어진 물건을 치우다가 배경 그림을 바라본다. 사이. 잠시 어제를 생각하는 듯 그림을 어루만지다가 그림을 기대고 그림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러다가 놀란 듯) 거기 누구지? (다가가서) 아니, 덕구 아냐? (흔들어 깨운다.) 덕구야, 덕구야!
덕구 : 놀라 깨어나며) "빈 바이 없..." 선생님.
이선생: 아니, 너 그럼 여기서...
덕구 : 내가 연극을 만쳐났어요. 잘 할라구 그랬는데...
이선생: (사이 격정을 누를 길 없어) 덕구야! (덕구를 포옹한다)
(노랫소리 들려 오며 조명 천천히 어두워진다. 해설자 위치에 조명이 든다.)
이선생: 덕구의 성탄절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 다음 해 덕구는 전근하시는 아버지 를 따라 지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어쩌면 일생에 단 한 번 뿐이지도 모르는 연극 을 그토록 이상스럽게 경험하고 말입니다. (카드를 들어 보이며) 며칠 전 덕구한테 서 받은 카드입니다. 앞뒤 빽빽하게 썼는데 끝부분을 읽어 드리죠. (의자에 걸터앉 는다.) 선생님 여기 주일학교에서도 연극을 합니다. 지지난 주일날 연극할 맘 있는 사람 모이라고 해서 갔더니 (덕구의 목소리로) 글쎄 연극 해본 사람이 나 혼자 뿐 이잖아요. 그래서 기분이 아주 좋았어요. 그래도 또 겁이 나서 캐스트는 안하고 스 타를 하겠다고 그랬어요. (다시 이선생의 목소리로 관객에게) 스텝을 스타라고 쓴 겁니다.
(피아노 곡이 깔리면서 다시 덕구의 음성으로)
덕구 : 선생님 보고 싶어요. 물론 애들도 보고 싶고요. 선생님 애들한테 이 카드 보여주셔야 해요. 심심하면 또 카드 보낼께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박덕구 올림.
(피아노 곡이 끝날 대 까지 사이)
이선생: (일어서며) 자리를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추억의 장을 재현해 주신 연기 자들과 인사를 드리면서 이 연극 을 마치겠습니다. (무대 뒤를 향해) 모두 나오시 죠. (손뼉을 두 번 치며) 연극 끝났어요. (모두 나와 인사한다.)
이선생: 덕구 어디 갔니?
모두들: 화장실 갔어요.
이선생: (밖을 향해) 덕구야, 박덕구! 아직 멀었니?
덕구 : 아아뇨! 이제 가요. (덕구 등장하여 인사한다.)
(모두들 기쁨을 나누며 연극을 마친다. 함께 성탄 노래를 부르는 것도 좋다